어릴적 읽은 동화 하나가 떠오른다. 아마도 이원수 아동문학이었겠지 싶다.
십 수년 전에 읽은지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이나마 기억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친 만물상 할아버지로부터 안경을 얻는데서 시작한다.

만물상 할아버지는 안경을 건네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이 안경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안경이라네. 이 안경을 쓰고 있으면 상대방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지."
이상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믿기 어려웠다.

주인공은 다음날 친구를 만난다.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는 편한 친구였는데 힘든 일이 있다며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사나이는 돈을 빌려줄까 망설이다가 시험삼아 안경을 썼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친구의 가슴에 텔레비전 화면과 비슷한 공간이 생기며 영상이 나타났다. 영상의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사실 친구는 주인공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을 시기하며 어떻게 이용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다는건 거짓말이었고 돈을 갚을 생각도 없었다.
주인공은 급히 핑게를 대고 자리를 떠났다. 안경을 얻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경이 없었으면 이렇게 나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을테니까.

잠시 후, 주인공은 사귀고 있는 여인을 만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상한 마음에 안경을 썼다. 이번에도 여인의 마음이 보였다.
여인의 마음을 본 주인공은 절망에 빠진다.
여인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여인의 머릿속에는 다른 남자의 생각뿐이었다.
더이상 그녀를 마주할 수 없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주인공은 마음 속에는 고통 뿐이었다.

며칠간 슬픔에 몸부림치는 주인공에게 마음을 보여주는 안경은 더이상 고마운 존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보는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걸 알았다.

그러던 어느날 주인공은 예전의 만물상 할아버지를 다시 만난다. 할아버지를 만나자마자 안경을 드리며 이렇게 괴로운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다.

안경을 받아든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주인공에게 단추를 하나 건네고 떠난다.
"이 단추는 안경과 반대라네. 이걸 달고 있으면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보여주게 되지. 잘 사용하게나."

주인공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이며 살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 지금도 떠오르는걸 보면 어린 시절의 뇌는 스폰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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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대화
마셜 로젠버그 (지은이), 캐서린 한 (옮긴이) | 바오


비폭력 대화는 바람직한 대화 방법을 설명하는 책이다. 좀 더 길게 표현하면 왜곡 없는 듣기와 말하기를 위한 의사소통 기술이라 하겠다.
저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투쟁으로부터 깊은 공감을 얻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내가 그렇듯 우리 대부분은 언제 튀어나갈지 모르는 비수를 입에 담고 있다. 그 비수는 무언가를 주장할 때 혹은 의사를 전달할 때, 심지어는 단순한 농담을 건넬 때에도 종종 튀어나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고 때로는 나에게로 되돌아와 상처를 남기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아프게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 물음에 대해 불관용이라 답한다.

여기서 나는 잠시 의문을 가졌다. 불관용이란 관용을 발휘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났을 때 그것을 용인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실 당연한 현상이다. 무한한 관용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불관용을 관용할 수 없듯 세상에 무한한 관용이란 존재할 수 없다. 설마 이 책은 흔하디 흔한 공자님 말씀을 이야기하는게 아닐까?

다행히도 저자가 이야기하는 비폭력 대화의 핵심은 방금 예상한 부분과 달랐다. 흔한 처세술 책에서처럼 "관용을 가져라."가 주된 내용이었다면 실망했겠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비폭력 대화란 관용을 이끌어내기 위한 대화 방법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아래와 같은 네 단계의 의사 전달 절차를 소개한다.
  1.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행동을 관찰하고 이를 전달한다.
    • 여기서의 관찰은 평가와 가치판단이 배제된 순수한 관찰을 의미한다. 특정 시각에 입각해 평가를 내릴 경우 상대방의 의사를 정확히 받아들일 수 없다. 더우기 상대방은 이를 비판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논쟁으로 발전할 우려도 있다. 관찰을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전달한다.
  2. 관찰한 바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표현한다.
    • 여기서의 느낌은 생각이 아니라는데 주목한다.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느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느낌이란 '기쁘다', '슬프다' 등과 같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감정의 일부분이다. 이러한 느낌의 표현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욕구 전달에 도움을 준다.
  3. 그러한 느낌이 들게 하는 욕구, 가치관, 소망 사항을 찾아내고 전달한다.
    • ' 활기차다', '우울하다' 등의 느낌이 있다면 동기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느낌의 원인은 상당수 '욕구의 만족 혹은 불만족'에 있다고 설명한다. 아직도 유교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한국 사회는 욕구의 표현에 인색하다.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에 따라 욕구를 억누르는데 익숙해졌고 사회에서도 절제의 미덕을 강조한다. 문제는 이게 하나의 습관이 되어 자신도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기 힘들어졌다는데 있다. 화가 나고 불만이 가득한데 무엇 때문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잠시 진정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감정이 왜 그리 되었는지 왜 이런 느낌을 받고 있는지 처음부터 짚어보고 진정한 욕구를 파악한다. 그리고 그것을 솔직히 전달한다.
  4.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부탁한다.
    • 아이에게 "착하게 살아라." 따위의 추상적인 행동을 부탁해서는 효과가 적다. 차라리 "인사를 잘 해라." 식의 구체적 행동을 부탁하는 편이 낫다. 자신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고 있을 때 구체적이지 않은 부탁을 하기 쉽다. 자신도 모르는걸 남이 해주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한마디로 이성과 감정을 총동원한 대화 방법으로 보인다. 사실 이걸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성이 필요한 단계에서 감정을 보이기도 하고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만을 이야기하기 쉽다.

서평에 앞서 위의 동화를 언급한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결점에 기인한다. 내 경우 비폭력 대화를 실천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나 자신을 표현하는게 서투르다는 것이다. 특히 감정 표현은 심각한 수준이다.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공부하면 정확한 의사소통 역량은 향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의 표현은 그리 간단히 학습되지 않는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사랑 없이는 감정의 발달을 기대할 수 없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을 흘리고 옆 사람에게 자신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대화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다.

어릴적 나는 동화에 나오는 안경이 갖고 싶었다. 안경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단추가 더 갖고 싶다. 어른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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