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일상의 기록 2009/01/03 12:17

요즘 다 귀찮다. 읽기도 귀찮고 쓰기도 귀찮다. 블로깅도 귀찮다. 돌아다니기도 귀찮고 심지어 술 마시기도 귀찮다. 예전엔 이럴 때 TV를 봤지 아마.

지난 29,30. 연말 워크샵을 갔다가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굴렀다. 만취한 상태로 혼자 별구경을 나온 게 실수였다.
점퍼가 망가지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플라스틱 상자가 박살 났지만 몸에는 약간의 긁힌 상처만이 남았다. 충분한 음주를 바탕으로 오징어 낙법을 구사했기에 참사를 막을 수 있었나 보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것과는 달리 구를 때에는 정신이 없어야 한다.
구르기 전에 본 하늘과 구르는 중에 본 하늘, 그리고 구르고 나서 본 하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은 구르고 나서 본 하늘이었다. 별과 별 사이가 커튼으로 연결된 하늘을 코카콜라 북극곰이 오로라 바라보듯 대자로 뻗어 한참을 바라봤다.

31일, 보신각 앞에서 모인다기에 누군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나갔다가 추워서 잠시 몸 좀 녹이려 들어간 영풍문고에서 라캉을 찾아 헤매느라 한참을 보냈다. 덕분에 괜찮아 보이는 라캉 서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했으면 번역이 개떡같던 다른 책을 주문했을 게 틀림없다. 어쩌다 개인적으로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그 번역가가 더 싫어지는 걸 피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런데 국내에 라캉 전문가가 이렇게 없는 줄은 몰랐다. 고전 자유주의가 숨고 신자유주의가 장악했듯 학계 관심도 영미사상이 장악했나 보다. 괜찮다. 아마추어 사진가가 진짜 사진가이듯 아마추어 지식인이 진짜 지식인이다.

서점 영업이 끝나고 다시 나가보니 사람들이 제법 모였다. 하지만 TV 화면에는 물론 소리로도 등장하지 못했으니 아는 사람만 아는 시위다. 5, 4, 3, 2, 1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일제히 날아오른 노란 풍선에 일제고사 반대가 씌어 있었단 것도 아는 사람만 아는 진실이다. 오세훈이 나타났을 때 얼마나 많은 야유가 있었는지도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사장 하나 바뀌니 바로 병신이 되어버리는 공염불방송 KBS 캐병신 대단하다.
길동 초등학교 최혜원 선생은 풍선을 나눠주다 꼴릴 때만 발동하는 공권력에 의해 유치장에 갇혔단다. 불법 시위도구 배포라던가. 풍선과 불법 시위도구가 잘 연결되지 않아 한참을 생각했다. 이걸로 어떻게 시위를 하지? 공중에 날아간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기호 1번 원소가 들어 있다면 터뜨리기라도 하겠지만 2번 원소가 들어 있으니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이지?
그러다 퍼뜩 떠오른 생각. 헬륨을 들이마시면 아름다운 목소리로 변하지 않던가. 그 풍선들을 허공으로 날려보낼 게 아니라 들이마셨어야 한다. 다들 풍선 하나씩 들이마시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동시에 '이명박 아웃'이라고 구호를 외쳤어야 한다. 이렇게 했으면 지금쯤 전 세계 동영상 사이트에서 1위 먹고 있을 거다. 아... 아깝다. 그렇게라도 웃어봤어야 하는 건데.

진보신당 동네 모임에서 퍼마시다 새벽에 들어와 자던 중에 잠시 시끄러워 10시도 되지 않아 깼다. 1리터 들이 포도 요구르트를 맛있게 들이키는 꿈을 꾸던 중이라 다시 잠들지도 못하고 포도 주스를 마시러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뭔 이야기로 시끄러운지 알았다.
어느 해직 교사가 일제고사 반대 시위도구 나눠주다 잡혀갔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읽은 아버지가 문제 있는 애라고 하셨다가 어머니랑 붙은 모양이다. 어머니는 '우리나라 교육이 얼마나 엉망인지 아느냐, 외국에서 보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교육인지 아느냐,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 무식해서 나라가 이 모양이다. 입 다물고 있는 요즘 지식인들도 문제다.'라며 그 여선생 빨리 꺼내주고 복직시켜야 한다고 하신다. 울 어머니 최고다. 울 어머니 요즘 읽고 계신 책이 박노자의 만감일기다. 재작년 금강산 관광에서 의식화되신 건 아닐테니 최근 몇 년간 독서를 가속하신 결과다.

조금 더 일하고 조금 더 읽고 조금 더 성찰하는 한 해를 목표로 이번 주말까지는 초롬이를 껴안고 수면에 용맹정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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